브라질42일 차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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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소리를 듣다

길에서 만나다 전체 본문을 무료로 공개한 온라인 독서본입니다.

42일 차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듯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그에 맞는 적절한 시기가 있다고 믿는다.

가장 적절한 때가 되면

모든 이야기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잠에서 깨었다.

조나다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고, 시계를 보니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새벽 6시.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약간 추위에 떠는 듯한 그의 몸 위에 어제 그가 친절하게 빌려주었던 모포를 도로 얹 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잠에 방해가 되지 않게 살짝 그곳을 벗어날 까 생각하다 고쳐먹고, 그의 어깨를 톡톡 쳐 가볍게 떠난다고 인사 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도롯가로 나오니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차가 많지 않았다. 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센트로를 벗어나 걸었다. 혼자 걷는다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조 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목적 없이 발길을 옮겼다. 내가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길이 나를 인도하듯이.

길을 걷는데 어제 노숙자 숙소에서 봤던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 갔다. 그도 어제 숙소의 인원 제한으로 들어가지 못했 는데, 아마 밖에서 추위에 떨며 잤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의 표 정은 밝아 보여 보기 좋았다.

양쪽에 호수를 낀 좁고 아름다운 길을 지나쳐, 시각이 정오를 지 났을 무렵, 오른쪽으로 거대한 모래언덕을 보았다. 왜인지 나는 길을 벗어나 그 모래언덕 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광대한 모래언덕이었다. 마치 내가 모래사막 위에 있는 듯이 느껴 졌다.

모래언덕의 정상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 푸른 바다와 해변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조그맣게 보이는 집들이 점점이 모여있는 마을과 그 뒤를 받치고 있는 산맥이 보였다.

나는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바다에서부터 모래언덕을 타고 올라 오는 바람이 내 귓가를 끝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 소리는 마치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듯했다.

난 나의 언어를 지우고, 그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자 하면 나의 상념이 나를 괴롭혔다. 그때마다 바람 소리는 잠잠해지다가도 다시 내 귀를 세게 때리곤 했다.

길에서 만나다 바람의 소리를 듣다 손스케치 그림

한참을 그렇게 눈을 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한 언어가 있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넌 그저 너의 길을 걷거라.’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건 나에게 안식과 자유를 주는 언어였다.

긴 모래언덕을 지나 해변에 다다랐다. ‘Praia do Campeche (깜뻬쎄 해변)

.’ 배낭을 백사장에 내려놓고,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갈매기 한 마리가 내 머리 위에 잠시 멈추어 있다가 다시 날아갔다.

‘안녕 하고 날 향해 인사하는 걸까?'

그리고 그 순간, 구름으로 막혀있던 하늘 사이로 가느다란 햇빛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얼굴 위로 눈 부신 햇살이 비추었다. 마치, 정말로 세상이 날 바라보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난 눈을 감고,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 순간을 기념하며 나를 위한 축배를 들기로 했다. 근처의 레스토랑 야외 벤치에 앉아 맥주를 한 잔 마셨다. 나와 비슷한 히치 하이크 족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다가와서 나에게 차를 가지고 있냐고 물어보고 돌아간 일 정도 외엔 특별한 일 없이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어느새 많이 지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센트로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커다란 호숫가를 지날 무렵, 내 바로 옆에서 작은 물고기 떼 수십 마리가 동시에 물 위로 점프하고는 ‘챠 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와’하는 경탄이 나올 만큼 멋진 광경이었다. 이 물고기들도 나에게 인사하는 것일까.

잠시 호수를 바라보다 다시 길을 걸었다. 호수 위로 작은 나룻배 한 척이 떠다니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저녁 시간에 맞추어 어제의 그 노숙자 숙소를 다시 찾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문 앞에 기다리는 노숙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는 그렇게도 많이 몰려있었는데.

거기 가만히 서 있는데, 누군가가 지나가며 오늘 이곳은 문을 열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길을 지나가던 또 다른 행인은 이 곳이 매일 문을 연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몰라 일단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내 생각에도 노숙자 숙소에 휴일이 있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7시 반까지 그 앞에서 멍하니 기다려본 후에야 처음 행인이 하였던 말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굳게 닫힌 문은 열 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시 하늘은 그저 쉬운 길을 걸으라고만 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더는 이 길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난 다시 떠나기로 했다. 이미 늦은 시각이었지만 플로리아노폴리 스 외곽으로 벗어나 쿠리치바 (Curitiba) 로 향하는 도로 위의 한 주유소에 도착, 그곳에서 히치하이크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곳 직원들이 이곳은 히치하이크가 금지되어있다며 날 거의 내쫓다시피 했다. 이 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난 그저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어두운 밤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한 마을 입구에 다다라 경찰서의 위치를 알려주는 팻말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이동했다. 그 경찰서에 도착하여 잠자리를 청해보았으나 바로 거절당했다. 브라질은 다른 나라에 비해 규율이 엄격한 듯 느껴졌다. 그래서 경찰서나 소방서에 서 잠을 자기가 쉽지 않은 것일 것이다.

난 마을을 조금 더 걸었다. 그리고 한 교회를 발견했다. 그곳은 예배 중이었는데 곧 끝날 것 같아서 잠시 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 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몰래 빠져나와 있는 한 커플과 이 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은 나 같은 동양인과 만나는 것이 낯선지 쑥스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내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재미 있어했다.

예배가 끝나자 나는 목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내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해보았지만, 그는 내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손짓하며 나에게 다른 노숙 자리를 알아보라고 말했다. 왠지 아 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또 하나의 ‘시험’ 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난 도로로 다시 돌아가, 계속 더 걸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했 다. 아무래도 슬슬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았다. 언제 삔 것인지 오른 쪽 발목에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고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조금 더 도로를 따라 전진하다가 새롭게 발견한 주유소 근처의 집 들을 둘러보며 적당한 노숙 장소를 찾았다. 이 근처에서 자고 내일은 아침부터 주유소에서 다시 히치하이크를 시도해볼 작정이었다.

한동안 헤매다 보니 마침 영업을 마친 한 건물 앞 구석자리가 눈에 띄었다. 꽤 넓은 천장이 있고 사람 한 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움푹 패 있는 곳이었다. 다른 곳을 더 찾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다. 그곳에 우의를 깔고 드러누웠다. 여긴 비과수 (Biguacu)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