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19
그리고 히치하이크
길에서 만나다 전체 본문을 무료로 공개한 온라인 독서본입니다.
31일 차
마음의 동요에 맞서 싸우지 말 것. 그냥 실질적인 전진에만 힘쓸 것. 두려움과 슬픔, 외로움은 마주할수록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말려들게 할 뿐인 것을. 결국 이 감정의 목적은 지금 나를 붙잡아두기 위한 것임을.
어젠 밤을 새워서 걸어야 했다.
적당한 잠자리를 찾지 못해 백사장에 누워 잠을 청하려 했지만, 옷을 네 벌이나 껴입고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결국 몸을 일으켰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떨어지고 있는 듯했 다.
근처의 주유소에 붙어있는 편의점으로 피신하여 테이블에 앉아 잠을 청해보려고도 했지만, 자정이 되자 가게 점원이 문을 닫는다고 나가라고 했다.
밖은 너무 추웠다. 바닷가 근처라 그런지 바람이 많이 불었다. 이 대로 밖에서 노숙하는 것은 무리였다. 주택이 늘어선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어두운 길을 따라 걷다 아직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한 집 앞을 서성였다. 안에서는 아직 깨어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움을 청해 볼까? 이방인인 나를 도와주려고 할까?’
결국 난 벨을 누르기를 포기했다. 그들의 평온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실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컸다. 그 집의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박았다. 한참을 그 렇게 있었다. 정말 잠을 청해보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혹시라도 그 집의 누군가가 날 먼저 발견하고 나와 선뜻 도와주기를 기다렸던 것인지 모르겠다.
한번 나약해진 마음은 끊임없이 고개를 들고 날 괴롭혔다. 이제 그만두라고, 이 의미 없는 여정이 너에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하는 소리가 계속 귓속을 맴도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빵을 꺼내어 잘근잘근 씹었다. 눈을 부릅뜨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 무너지지는 않을 거다.’
빵으로 배를 채우고 몸을 일으켰다.
‘적어도 널 배고프게 하진 않을 테니, 내 몸아, 버티어다오.’
난 차라리 자지 않고 걷기로 했다. 계속해서 걷는다면 적어도 추 위는 느끼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애써 기합을 넣고 다시 힘차게 길을 걸었다. 어둠 속을 걷다 때때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수많은 별이 날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마음의 나약한 목소리는 어느새 사그라들고 있었 다. 몸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걸음이 느려졌지만, 내 마음이 또다시 흔들릴까 두려워 나를 더욱 채찍질하며 걸음을 계속했다. 나는 상황 에는 순종적이지만, 마음의 변덕에 순종적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도롯가를 걷다 어느 순간 너무 졸음이 밀려와 견딜 수 없었다. 결 국 난 길 한쪽 구석에 대자로 드러누워 잠시 눈을 붙이게 되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얼마나 있었을까, 차 한 대가 내 곁에 멈추어서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가까이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그 경찰차를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막 문을 열고 나오던 그 경찰은 내가 갑자기 일어나니 오 히려 당황한 모양인지, 허겁지겁 차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폴리시아! 폴리시아 (경찰) !”
난 경찰차 문 앞까지 뛰어가 창문을 두드렸다. 난 지금 여행 중이고 잘 곳이 없다고, 도움을 달라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 경찰은 끝끝내 창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나에게 훠이훠이 손짓만 했 다. 그리고는 끝내 날 두고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그들은 아마도 내가 죽어서 도롯가에 쓰러져있던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 덕에 잠이 완전히 깬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그리고 긴 걸음의 끝에 마침내 동이 트는 것을 보게 되었다. 햇볕이 비치니 추위가 한 걸음씩 물러나는 게 느껴졌다. 졸음이 쏟아져 버스정류장에 잠시 드러누워 봤지만, 왠지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난 다시 일어나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너무 지나치게 걸었던 탓일까, 엉덩이 안쪽이 따갑고 아파지기 시 작하더니 결국엔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휴식이 필요
á 한 거라 생각해서 아틀란티다 (Atl ntida) 라는 마을의 성당과 경찰서를 찾아가 오늘 밤 잠자리를 청해보았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최근 며칠간 경험한 우루과이의 가을은 너무도 추웠다. 이대로 또 해가 지면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계속 걸을까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지금처럼 엉거주춤 걸어서는 다음 마을까지 이동하기 힘들 것 같았고, 그건 나의 몸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 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히치하이크 (현지어로 A Dedo) 를 하기로 했다.
잠시 내가 생각했던 목표, ‘걸어서 브라질 국경까지’를 떠올렸지만 어차피 어떠한 성취감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방식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여행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도로의 갓길에 서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히치하이크를 시도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힘겹게 걸음을 옮겨 그리 멀지 않은 주유소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주유하는 차량들에게 어디로 향 하는지를 묻고 탑승을 부탁했다. 여러 번 거절을 당한 끝에 마침내 한 운전자가 나를 태워주겠다고 승낙했다. 그가 로차 (Rocah) 라는 도시로 향하는 길이라고 하길래 나도 거기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거기가 정확히 어딘지도 모른 채였다.
나는 어떻게든 빨리 우루과이를 벗어나서 좀 더 따뜻한 브라질로 이동하고 싶었다. 브라질까지만 가면 적어도 노숙을 하는 일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나를 태워준 그는 루돌프라는 이름의 중년 남성이었다. 젊었을 때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했던 덕에 그는 영어가 유창했다. 우린 차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특히 한국의 군대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걸었다면 며칠이 걸렸을 거리를 단숨에 주파하여, 우리는 마침내 로차의 한 주유소에 도착했다. 한 공장의 사장이면서 화가라는 그는, 붓과 물감을 트렁크에서 꺼내어 브라질의 두 개의 큰 도시 이름을 종이판 양면에 각각 적어 주었다. 그는 그 종이를 나에게 주며 말했 다.
“여기는 아주 큰 주유소니까 그리로 가는 차들이 많이 들를 거야. 운이 좋으면 오늘 내로 브라질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브라질 번 호판을 단 차량이 들어오면 이 종이판을 보이면서 그리로 가는지 물어봐.”
많이 신경 써주는 그가 고마웠다. 내 나이의 두 배는 족히 넘을 듯한 그가 나에게 말했다.
“Good luck, My friend (행운을 빌어, 친구) !”
우린 서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헤어졌다.
그가 떠난 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안타깝게도 브라질 번호판의 차 량은 주유소로 들어오지 않았다. 또다시 해가 지려 하고 있었기 때 문에, 어디로든 더 가야겠다 싶어서 우루과이 차들에게 행선지를 묻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를 실패하고 있을 때 한 차량이 내 옆에 멈춰 섰다. 운 전석에 앉은 한 여성이 나를 보며 물었다.
“¿A dónde vas (어디로 가요) ?”
난 브라질과의 경계선인 츄이 (Chuy) 로 간다고 하자, 그녀가 안타깝 다는 듯이 자신이 가는 곳은 그 방향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대화를 나누었고, 내 상황을 이해한 그녀가 오늘은 일단 자기 집에 가서 쉬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집이 바닷가 쪽이라 경관도 좋다고 했다.
휴식. 지금 내가 무엇보다 원하는 게 그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얼 른 그녀의 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이름은 아나. 그리고 뒷좌석에는 그녀의 한 살배기 딸인 이사라가 타고 있었다. 아나는 암스테르담에서 한동안 살다 왔다고 했는데 영어가 유창했다. 말도 많은 편이라, 내가 가만히 있어도 심 심하지 않아 좋았다.
마침내 도착한 그녀의 집은 정말로 바다를 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집 마당에서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낭만적인 집이었다. 집으로 들어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는지.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먹고, 그녀와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일찍 침대에 누웠다. 이틀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해 피곤하지 않냐며 그녀가 날 배려해주었다.
내일은 바닷가에 가자는데, 난 내일 내가 몇 시쯤에나 눈뜰 수 있 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32일 차
평온한 하루였다.
느지막이 일어나 빵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냄새가 나는 옷가지들을 꺼내어 빨래를 했다. 정오쯤 되어 아나의 차를 타고 근처 해변으로 가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했다. 편안한 의자에 몸을 기대어, 바 다를 바라보며 무념무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잔잔한 파도 소리와 따 뜻한 햇볕이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다.
34일 차
라팔로마 (La paloma, 아나의 집이 있던 곳) 를 떠나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가 이제 떠나야겠다고 말했을 때, 아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편안함에 너무 익숙해질까 봐 그러는 거지?”
반은 맞았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매일 밤 반복되는 아나와 그 녀의 딸 이사라 간의 전쟁 같은 분위기를 더는 감당할 수 없어서이 기도 했다. 이사라는 어김없이 울고, 비명을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조용할 날이 없었고, 아나는 그런 그녀에게 크게 고함을 지르고 이따금 손찌검하기도 했다. 그걸 지켜보는 게 가슴 아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그리 많지 않았다. 난 그런 아나를 말려보기도 하고 이사라가 좀 더 얌전히 있을 수 있도록 달래보기도 했지만, 그런 건 일시적일 뿐이란 걸 알고 있었 다.
차를 마시며 아나에게 얘기했다.
“너 자신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넌 너의 상황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나는 미혼모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유로웠던 과거의 자신과 비교해 속박과 같은 지금의 나날이 너무 싫다고 했다.
그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더 깊이 관여할 수 없음을 느 꼈다. 내가 평생을 그들 옆에서 도와줄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행동이 그들에게는 괜한 참견일 수밖에 없었다.
난 결국 그들이 스스로 길을 찾기를 기도하며 떠나는 수밖에 없었 다. 사람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서로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게 된다. 그건 그들이 원하는 것도,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도 아 니었다.
내가 떠나기 전 아나가 한 번 더 물었다. 자신의 차로 함께 브라 질까지 가지 않겠냐고. 자기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지만 난 이미 홀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뒤였다.
그녀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주유소까지 차로 바래다주었다. 우린 그곳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했다.
‘어머니들이란 참 위대하구나.’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난 참 행복하구나. 집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커왔구나.’
갑자기 부모님이 그리워졌다.
어쩌면 하나의 인생이라는 것이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길고도 지루한 길을 걷듯이 인생에도 더욱 전진하기 위 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때때로 맞이하는 우연한 만남과 행운에 기뻐하고, 가끔 예상치 못한 고난을 맞이하는 것. 매일 같은 걸음을 걷더라도 매일 새로운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이 있다 면 하루하루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2개월 전엔 고작 일주일이 걸렸던 상파울루 - 부에노스아이레스 간의 거리를, 지금 나는 그보다 몇 배나 더 긴 시간을 들여가며 돌 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여정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린 인생에서 더욱 쉬운 길, 더욱 빠른 길을 택하기 위해 어떤 의 미에서의 가치를 놓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길은 지평선을 넘어 끝없이 이어져 있는 듯했다.
우루과이는 턱없이 낮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듯이, 걷는 내내 주위 엔 온통 벌판과 풀을 뜯는 소들뿐이었다. 해는 어느덧 빨갛게 익어 가며 숨어들어 가는데, 난 온종일을 걸으며 단 하나의 슈퍼마켓도, 마을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미 내 모든 식량은 바닥 난 상태였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지면서 기온이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지난번처 럼 또 추위에 떨며 밤을 새워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데에 생각이 미치자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식량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길을 걷다 커다란 목장 안에 있는 집 한 채가 보여, 무작정 달려가 그 집 주인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청했지만 거절 당했다. 뒤이어 걷 다 또 다른 집 한 채를 발견했지만, 그 곳 할머니 역시 날 받아주지 않았다. 길을 계속해 걸어도 더 이상 집은 보이지 않았고, 지나가는 차를 붙잡아보려 했지만 모두 손을 흔드는 날 쌩 하고 지나쳐갔다. 게다가 지나가는 차량마저 드물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해가 이미 저편으로 넘어가 어둠이 점점 더 깊어져 오고 있었을 때, 마침내 한 트럭이 내 앞에 멈춰 섰다. 내가 반갑게 뛰어가 어디로 가는 차량인지를 묻자 어딘가 지명을 얘기하는데, 그게 도대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든 여기보단 낫겠지, 하며 곧바로 태 워달라고 했다. 그는 고갯짓으로 뒤에 타라는 신호를 보냈고, 나는 칸막이 하나 없는 휑한 트럭 뒤, 짐칸 위에 올라탔다.
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배낭을 등 뒤에 받치고 앉아 저 멀리 미세하게 남아 있는 붉은 저녁노을을 바라보 았다. 난 결정적인 순간에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트럭은 나를 한 갈림길에 내려주었다. 본인들은 조 금 더 가야 하는데 그곳은 완전히 시골이고, 이곳에서 반대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한 마을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 들과 인사하고, 그 이름 모를 마을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고, 고요한 분위기였 다. 여기저기를 헤매다 다행히 슈퍼마켓을 하나 발견하여 마침내 먹 거리를 살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 찾아간 소방서에서는 선뜻 내게 침대 하나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곳의 친절한 소방관들이 자신 들의 음식을 나누어주었고, 오래간만에 먹는 따뜻한 밥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난 지금도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모르지만, 일단 자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