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1일 차9

02 / 9

버스터미널에서 빈털터리가 되다

길에서 만나다 전반부를 무료로 공개한 온라인 독서본입니다.

2008년 3월 5일, 아침 7시 반.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의 버스터미널, 41번 플랫폼. 나는 건물 안 대기석에 앉아있었다. 로사리오(Rosario)행 버스 출발 시간인 9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나는 배낭에서 MP3 플레이어를 꺼내어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자미로콰이'의 흥겨운 비트가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음악에 빠져있다가, 문득 내 스페인어가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MP3플레이어에 담긴 스페인어 회화 듣기파일의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대체로 쉬운 표현들이 흘러 나와 입으로 중얼거리며 따라 할 수 있었지만, 이내 어려운 표현들이 이어지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이국어의 홍수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던 건지, 아니면 지난밤 늦게까지 와인을 마셔댄 탓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나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 이내 졸기 시작했다. 졸고 있던 중간 중간 세 번 정도를 깨었다. 내가 깨어날 때마다 귀에서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눈 앞에는 내 모든 여행 물품을 넣어 둔 배낭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눈을 떴을 때는 불현듯 불안한 마음이 들어 내 발을 배낭에 걸쳐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네 번째 잠에서 깨었을 때, 내 눈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귀에서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터미널 안도 변함없이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지만, 내 배낭만은 이 세상에서 갑자기 소멸해 버린 듯 했다. 순간,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혼잡한 터미널의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홀로된 적막감에 둘러 쌓였다.

내 배낭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벌떡 일어나 주위 사람들에게 내 짐을 가져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냐고 소리쳤다. 그들은 보지 못했다는 건지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건지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나는 다급해져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내 배낭을 훔쳐 간 도둑이 아직 터미널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가며 터미널 안의 많은 사람과 그들이 가진 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하지만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내 배낭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두 리번거리며 터미널 안을 돌아다니던 나는 마침 경찰복을 입고 있는 한 무리를 발견하여 그곳으로 달려갔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자세한 정황을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배낭을 잃어버렸다는 뜻만을 겨우 전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일단 나를 경찰서로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의 기계적인 반응은 지금 경찰서로 간다고 한들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지날수록 도둑은 더욱더 멀리 벗어나게 될 것이었다. 후회와 자책감이 날 괴롭혔다. 어떻게 가방을 던져두고 마음 편히 잠이 들 수 있었던 것인지, 왜 지갑과 여권마저도 가방에 넣어두었던 것인지. 이곳 남미에서는 소지품 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이야기를 그동안 귀가 닳도록 들었으면서...... 반 시간가량을 그렇게 무작정 뛰어다녔다. 사실, 나의 마음속으로는 이미 배낭 찾기를 포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머릿속에는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쉬지 않고 터미널 안과 주변을 더 돌아다녔다. 두세 바퀴 가량을 더 돌고 나서야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 길 한구석에 멈추어 서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내가 [연금술사]를 감명 깊게 읽더니 산티아고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구나. 만약 이 모든 게 하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것조차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 걸까. 그렇다면 난 받아들이겠다.’ 아직 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과 나를 동일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나는 경찰서로 향했다. 그곳의 경찰 중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한 시간가량을 기다린 끝에야 영어가 가능한 경찰관 한 명을 통해 조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개인 신상정보와 사건의 전후사정, 그리고 여권과 돈, 옷가지, 카메라, 전자사전 등 도둑맞은 배낭 안에 들어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그렇게 작성된 분실확인서를 받은 후, 사용할 곳이 많을 테니 꼭 다수의 복사본을 만들라는 경찰관의 말을 몇 번이나 들으며 경찰서를 나왔다. 이들은 내 짐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곳 버스터미널에서는 수많은 여행객이 분실사고를 당하고, 그들 중 분실물을 되찾았던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난 그저 나의 분실사고에 대한 확인서 한 장을 받아 나올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길 위에 멈추어 서서 지금 내가 가진 전부를 확인해 보았다.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었던 50페소(당시 아르헨티나 1페소는 원화 약 350원), 버스표를 환불 받은 28페소, MP3플레이어, 입고 있던 옷, 경찰서로부터 받은 분실확인서, 그리고 내 성한 몸뚱어리.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쩌면 이게 내가 그렇게도 바라왔던 순간이 아닌가. 어떤 상황도 이겨나갈 수 있는 내가 되자고, 내 몸 하나 성하다면 어떤 일이든 해나갈 수 있다고, 그렇게 철썩같이 믿어 왔던 내가 아닌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두 어깨의 가벼움을 자유로움으로 받아들였다. Nothing to lose. 잃을 게 더 없다고 생각하니 나의 발걸음이 다시 편안해졌다.

나는 우선 한국 대사관에 들렀다. 대사관에서 어떠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그들은 한국에 연락하여 금전적인 지원을 받으라는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일단 여권을 단수로 새로 발급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어제 묵었던 호스텔로 향했다. 지금 여권을 새로 만들려면 내 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을 털어야 했는데 그건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제 묵었던 호스텔로 돌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거기서 일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해 볼 작정이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일단 신용카드를 정지 시켜 달라고만 이야기하고,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스스로 나약해지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체크아웃 한 호스텔에 다시 돌아온 나는 주인 인 다니엘에게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여기서 일을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급여는 필요 없다고, 단지 숙식만 제공해 달라고. 하지만 다니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 이미 직원들이 너무 많을뿐더러, 그들이 일으키는 문제가 너무 많아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그냥 한국으로 전화해서 부모님께 돈을 보내 달라고 하라고 열 번이 넘도록 반복했다. 대사관에서도 들었던 같은 이야기 였다. 슬슬 짜증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는 나에게 단 하루의 무료숙박만을 허용해 주었다. 그리고는 내일까지는 꼭 한국에 전화를 걸고, 이곳을 떠나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무래도 내일은 다른 호스텔을 돌며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

2일 차

나는 호스텔 로비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내가 어제 체크아웃을 하고 떠난 걸 알고 있었던 호스텔의 몇몇 여행자 친구들은 다시 돌아온 내 사정을 궁금히 여겼고, 이들을 통해 내 이야기는 호스텔 내에서 금세 펴져나갔다. 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이곳의 많은 여행자 덕에 담배는 쉬지 않고 피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호스텔에서 일하는 두 명의 남미 여성인 마리아나와 로자는 본인들도 여유가 없을 텐데 내 손에 각각 50페소와 20페 소를 건네며, 부탁이니 받아달라고 ‘Por favor (제발)’를 반복했다. 옆에서 스페인어 통역을 도와주던 이탈리아인 여행자 프란체스카가 나중에 내가 다시 여유가 생겼을 때 갚으면 되는 거라며 받으라고 말했을 때야 비로소 나는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세상은 아름답구나.’ 주위 많은 사람의 자상함에 눈물겨웠다. 잠시 후, 마리아나와 로자가 이번에는 여분의 티셔츠와 양말, 샴푸를 가지고 왔다. 난 다시 한번 고개를 떨구며 그것들을 받아야 했다.

한편, 나는 다니엘이 어젯밤 늦은 시각에 얼핏 나를 어떻게 할지 생각 중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에 기대를 품고는 로비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왠지 기분 좋은 예감이 있었다. 세상이 날 돕는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다니엘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다니엘은 열흘 뒤에 자신의 새 로운 집 공사를 하는데 페인트칠과 허드렛일을 할 인부가 필요하다며, 잠자리와 음식은 제공하겠으니 보수 없이 그곳에서 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난 지금 형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당장 그 제안을 받아들였 다. 다니엘은 그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호스텔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보자고 했다. 우리는 어떤 계약이라도 체결한 듯이 악수를 했고, 나는 사무실을 빠져 나와 로비의 테이블로 돌아와 앉 았다.

그렇게 간절했던 생존의 문제가 마침내 해결되자, 이번엔 또 다른 생각이 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여행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 난 단지 여기서 연명해나가다 상파울루로 돌아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인지. 난 무엇을 위해이 먼 곳에 와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