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29일 차 6

10 / 19

또 다른 도난사건

길에서 만나다 전체 본문을 무료로 공개한 온라인 독서본입니다.

29일 차

벤치에 누워 얼마나 잤을까. 빗방울이 얼굴 위로 떨어지는 감촉에 잠이 깨었다. 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왜 내가 공원에서만 자면 비가 내리는 걸까?’

빗방울이 점점 거세어지는 것 같아 서둘러 짐을 챙겨 근처 처마 밑으로 이동했다. 한 키오스크의 처마 밑에 들어갔을 때 비가 마침 내 ‘쏴’ 소리를 내며 퍼붓기 시작했다.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오늘 편히 자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하염없이 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한 노인도 비를 피해 내가 있는 곳으로 들어 왔다.

그의 이름은 로만, 70세 노인이었다. 그가 영어를 조금 할 줄 알 아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했다. 그는 자기 평생에 한 국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무척 기뻐했다. 우리는 바다와 산, 가족, 도시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얘기를 나누다가, 비가 조금 사그라질 때 즈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이제 버스를 타 러 갈 거라며, 하지만 어디로 향할지는 미정이라고 했다. 그는 경로 자용 무료 버스 카드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아마 매일 그렇게 버스와 공원을 전전하며 생활하는 듯했다.

그와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헤어진 뒤, 난 비가 잠잠해진 틈을 타 새로운 노숙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커다란 한 은 행의 정문 앞 공간을 발견하게 되어 그곳을 오늘의 새로운 잠자리로 정했다. 계단 위 높은 곳에 개방된 공간이라 안전해 보였고(바람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그곳에는 커다 란 처마가 있고 대리석이 넓게 깔려 있어 여유 있게 비를 피하고 드러눕기에 좋은 장소였다.

그곳에서 다시 가방을 베개 삼아 눕고는 잠을 청했다. 옷을 두껍게 껴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바람이 세게 불고 있어 추웠다. 추위에 떨다 잠에서 깰 때면 비몽사몽간에 윗몸 일으 키기나 팔굽혀펴기를 하였다. 어떻게든 몸에서 열을 내보려는 노력 이었다.

그렇게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가 새벽 6시쯤 누군가가 나를 흔드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보니, 내 옆에 선 한 남자가 은행 영업준비를 해야 하니 비켜달라고 했다. 내가 가방을 챙겨 자리를 뜨자 그는 은 행 앞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방서에 가서 맡겨두었던 짐을 찾은 뒤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다. 그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몸도 피곤하고 날씨도 좋지 않으니 오늘 하루는 어디선가 푹 쉬고 내일 출발하는 것이 좋 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제 들은 대로 10시에 P.Jimmy를 만나러 가 보기로 했다.

한 건물 처마 밑에서 사전을 뒤적거리며 10시가 될 때까지 기다 렸다. 그리고 10시쯤 되었을 때, 어제의 그 건물로 갔다. 오늘에서 야 알게 되었지만, 그곳은 ‘Pre-Universidad’이라고 하는, 일종의 예비 대학이었다. 수많은 젊은 학생들로 건물 앞이 붐비고 있었다.

종이 치고, 수업이 곧 시작하는 듯 학생들이 우르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그곳으로 뒤따라 들어가 안내원을 찾아갔다. 어제의 그 여자 안내원은 없었고, 대신 다른 남자가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다. 그에게 P.Jimmy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해보았으나, 그는 현재 학교에 없다고 했다. 그가 전화 연결을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으나 번번이 불통인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동안 그곳에서 기 다리던 나는 곧 다른 곳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을 돌렸다.

어제 들었던 또 하나의 정보에 따르면, 이 도시에는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숙박시설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잠을 자려면 우선 ‘Puerta de Entrada’라는 곳에서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고 했기 때 문에 그곳을 찾아갔다. 도착해보니 그곳은 아직 문이 잠겨있었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한 청년에게 물었더니 오후 3시에나 문을 연다고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그 옆에 앉아 함께 기다 리기로 했다.

그는 자신을 다니엘이라고 소개했다. 나이는 나와 같았다. 그는 현재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며 나에게 그의 이력서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곳에 앉아 다니엘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다양한 행색의 사람들이 점점 건물 앞으로 모여들었다.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 이빨이 반 이상 빠져나간 젊은 청년들, 어디서 다쳤는지 이마와 한쪽 팔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사람 등. 하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곧 그들 모두가 친구처럼 느껴졌다. 낯선 방문 객인 나에게 그들은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고, 야한 잡지를 보여주며 킬킬거리며 같이 웃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마침내 오후 3시가 되었다.

한 남자가 건물 안에서 문을 열었다. 그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서인지 먼저 온 사람들 순으로 몇몇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 작했다. 그때, 한 노숙자가 날 가리키며 한국에서 온 여행자인데 아 까부터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덕분에 나도 엉겁 결에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 앞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웅성대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나는 안내를 받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옆에 배낭을 내려놓고 그 낯선 공간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아까부 터 나와 함께 기다렸던 다니엘이 다가와 나에게 자전거를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자전거? 문 옆에다 자물쇠를 채워서 세워두었지.”

그가 자전거를 건물 안으로 들여다 놓으라고 손짓했다. 어서 빨리 가져오라고. 그가 그 건물에 일하는 한 남성에게도 말해주어서 난 그와 함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이미 자전거는 없었다. 실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자전거는 항상 기둥에 매어야 한다고, 예전부터 여러 번 그렇게 교 훈을 얻었으면서......

아까 그렇게 친근하게 대해주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난 조금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이것 역시 나의 천성적인 부주의함이 원인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자전거. 그것이 놓여있던 자리를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져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으며 대화했던 그들에게. 내 자전거를 누가 가져가는 걸 보지 못 했냐고, 너희들이 바로 이곳에 계속 있지 않았냐고, 너희들의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냐고.

하지만 모두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나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다그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눈을 피하기만 했다. 순간 나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생 각이 번뜩 들었다. 내 마음속에서 사람에 대한 불신이 또다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건물 안에 놓아둔 나의 짐이 불현듯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곳에도 몇몇 먼저 들어간 이들이 있었고, 이젠 그들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일단 자전거는 잊고 배낭을 챙기러 건물 안으로 다시 뛰 어 들어갔다. 다행히 짐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주 저앉았다.

난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끼며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게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이곳 사람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태연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돌린 채 입을 꾹 다문 다니엘의 표정은, 마치 그게 이곳 세계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아까 그렇게 살갑게 대해 주었던 이들이 이젠 더 이상 내 옆에 있어 주지 않았다. 아마 그들 에겐 암묵의 룰이 있는 것이라고, 난 그렇게 막연히 느낄 수가 있었 다.

그 시설의 관리자로 보이는 남자가 나를 잠깐 보자고 했다.

“자전거를 방금 도둑맞았다고요?”

“예.”

“그렇다면 너무 소란을 피우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왜 그런 거죠?”

“그게 신상에 이로울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뜨는 게 좋을 겁니다.”

“잠깐만요. 그 전에 질문이 있는데, 이들은 누가 내 자전거를 가 져갔는지 알고 있는 건가요?”

“예. 아마도요. 그들은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돈이 필요하지요. 아마 당신의 자전거를 팔아 그 돈으로 뭔가를 사려 할 겁니다.”

“제가 오늘 밤 저들과 같이 잠을 자는 건 안전하지 못한 건가요?”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듯 보입니다. 제가 또 다른 숙소를 알 려드릴 테니 그쪽으로 지금 바로 가시죠. 이민자들을 위한 숙소입니 다.”

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가 소개해준 Casa de Immigrante (이민 자 숙소)

로 곧장 이동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에게서 이민자 숙소의 위 치가 표시된 지도를 안내받고는 그 건물을 나왔다. 길을 걷는데 내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건물 앞에 있던 노숙자 무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조용히 얘기했다.

“이곳엔 나쁜 사람들이 많아. 그들은 돈이 없고 배고프지.”

난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정도의 말이라도 위로가 되었다. 그는 슈퍼에 들러 무언가를 살 거라고 했고, 난 그와 악수를 하고 길을 계속 걸었다.

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들이 나쁜 게 아니라 가난이 나쁜 것 이다. 배고픔이 나쁜 것이다.

내 일정이 다시 막연해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난 지도를 펼치고 앞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게 될 도시들을 짚어보고 있었는데, 이젠 그 계획들을 다시 지워야 하는 것이다. 내 자전거는 날 떠났다. 짧은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타이어 펑크를 내며 날 속 썩이더니 마침내는 날 두고 떠나버렸다.

넌 나의 길이 아니었던 거냐. 아니면 넌 너의 할 일을 다 했기에 이제 떠나간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