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여행첫째 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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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아날로그’

자라고 싶은 아이, 아이이고 싶은 어른 전반부를 무료로 공개한 온라인 독서본입니다.

사전계획없이 도착한 제주공항에는 코로나 19 역학조사를 위한 자체 모바일 앱 ‘올레QR 코드’ 홍보가 한창이었다. 그 앱을 다운 받기만 하면 서귀포 감귤 체험장의 무료초청장을 준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곳을 이번 제주 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로 정했다. 이번 여행을 어디에서 시작할 지는 공항에 도착한 뒤 정하자고, 건욱이와 미리 약속을 했던 터였다. 그리고 우리는 렌터카나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로 이동하기로, 리무진 버스를 이용하기 보다는 일반 시내버스를 타고 여행 시작 지점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우리는 휴대폰 앱으로 버스 노선을 찾지 않고 공항 내에 위치한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그곳에서 서귀포 감귤 체험장으로 가는 버스노선을 물어보았더니 그 관광안내소 직원은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요즘 시대에도 일일이 버스노선을 물어보는 사람이 있나,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컴퓨터로 감귤 체험장 위치를 확인하더니 종이쪽지에 두 개의 버스번호와 함께 환승해야 하는 정류장 이름을 적어주었다. “이곳에서 버스를 갈아타셔야 해요.” 나는 그 쪽지를 건욱이에게 건네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데, 건욱이는 버스번호가 적힌 그 쪽지를 마치 잃어 버리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있었다.

종이쪽지에 적힌 버스번호를 몇 번이나 확인하며 정류장에 서있던 우리는 무사히 첫 번째 버스에 탑승했고,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이 우리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조금 재미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버스의 가장 뒷자리로 가서 넓게 자리를 차지 하고 앉았다. 건욱이는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제주도 지도를 펼쳐 보기 시작했고, 난 버스가 지나치는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어느새 거친 비로 바뀌어 있었다. 한편 우리는 갈아타야 하는 버스정류장을 놓칠세라 다음 정류장 안내방송이 나올 때마다 귀 기울였다.

드디어 우리가 환승해야 하는 장소에 도착하여 버스를 내리는데, 마침 하차장에 있던 물웅덩이에 건욱이의 신발이 한번 들어갔다 나왔다. 우리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인 건욱이 표정을 내가 잠깐 살피는데, 다행히 방수가 잘 되는 신발이라고, 건욱이가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에 나는 크게 안도하였다.

찾아간 감귤농장 체험 장소는 하필 점심시간과 시간이 맞물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비는 쉬지 않고 쏟아지는 데 근처에 마땅히 비를 피할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근처의 카페를 찾아 다시 이동하기로 했다. 한편 세차게 내리는 빗속을 뚫고 또다시 어딘가를 찾아 전진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딘가 이미 여행자스러웠다.

여행자가 되기에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마음가짐 그걸로 충분했던 게 아닐까 건욱이는 이미 여행하고 있었다

카페에서 마신 초코라테는 건욱이가 지금껏 마신 것 중 최고의 초코음료 그곳에서 먹은 기름떡 세 조각은 우리의 점심식사 이제 첫째 날인데 건욱이의 예산관리는 이미 자로 잰 듯 정확하다

마침내 다시 찾은 감귤 체험농장 무료로 마음껏 감귤을 시식할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감사했고 각자 한 봉지째 감귤을 담아 나서는 마음이 푸근했다 우리는 운이 좋은 사람 지금껏 빗길을 헤치고 온 고생은 이미 잊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우리의 도보여행은 사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 올레길 5 코스에 들어서 걸음을 옮기는 우리 앞에 비는 멈추지 않고 내렸고 건욱이는 금세 지쳐갔다 자칫 이 여행에 따라 나온 것을 후회한다고 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지만 다행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걸음이 느려지고 칭얼거림이 시작된 건 어쩔 수 없었던 일 비를 막아주는 처마를 발견해 그 아래에 짐을 잠깐 내려놓고 쉬기로 했다 건욱이를 쳐다보니 멍해 보였다

계속하여 걸음을 옮긴다 아직 숙소는 미정 우린 멈추지 않을 것처럼 전진을 계속하다가 건욱이가 너무 지쳐 보여 근처에 적당한 숙소를 찾기 시작했는데 공천포 마을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였다

‘당신의 공천포 게스트하우스’

이곳에서 건욱이가 혼자서 샤워를 한다 혼자서 이를 닦는다 스태프들과 함께 보드게임을 한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다가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건욱이는 이미 여행자이고 다 큰 것 같았다 문득, 건욱이는 그저 다 큰 어른이 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가 마치 여행의 많은 나날을 이미 지나친 것처럼 다채로운 상념이 스친다 우리가 건욱이를 완벽한 아이로 포장하려 한다면 건욱이는 마음껏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내려놓아라 기다려주어라 변화가 필요한 건 건욱이가 아니라 내 쪽에서였다 인내와 믿음 그리고 아마도 약간의 거리두기 우리가 각자 다른 인격체이며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우주라는 진실 아이는 나의 일부가 아니며 나 역시 아이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진실 우리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커간다는 진실 언젠가 우리는 서로의 벽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진실 그리니 슬퍼 말고 지금부터 존중해 주어라

건욱이는 아직 돈 계산이 서툴러 건욱이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동안 뒤에 줄이 길게 늘어서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개입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우리의 하루 예산을 8 만 원으로 잡고 여행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하루 경비를 감당하기에 빠듯하여 내일부터는 9 만 원으로 올리기로 하였다 이 돈은 매일 아침 건욱이의 지갑에 채워질 것이고 건욱이는 이 예산안에서 우리의 숙식을 포함한 하루의 여행 경비를 해결해야 한다 건욱이는 돈 관리의 막중한 책임을 짊어짐과 동시에 중요한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