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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울루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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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일 차
나에게 과업과 능력이 주어지지 않음이
자유가 주어진 것임을 알게 하소서
새벽 6시에 일어나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은 상태였고, 길거리에는 그다지 많지 않은 사람들만이 나와있었다. 몇몇 사람에게 길을 물어 116번 도로를 찾아가다 한 남자가 자신의 차로 태워 주겠다고 하여 그곳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그를 보내고 도로를 바라보았다.
‘이 도로를 따라가면 상파울루가 나오는 거구나.’
이제 나의 여정이 끝나감을 느꼈다.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날씨가 맑아 웃통을 벗은 채 가방을 메었다. 선선한 바람을 맨몸으로 맞는 게 기분 좋았다. 한동안 그렇게 걷다가 한 주유소에 닿았다. 그리고 거기서 히치하이크를 시도하다가 그 곳 직원에게 제지당했다. 히치하이크가 규정상 금지되어 있다는 것 이었다. 할 수 없이 그곳을 지나쳐 더 길을 걸었다. 날씨가 좋아 기 분도 상쾌했고, 이대로라면 더 오래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또 다른 주유소에 닿았다. 그다지 큰 주유소는 아니었다. 그곳에 들어오는 차들에 가는 방향을 묻기 시작했다. 몇몇은 내가 말을 걸자마자, “No carona (태워줄 수 없어요) ”라고 하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고 가버렸고, 몇몇은 나에게 친절히 대답해 주었지만 가는 방향이 달랐다.
그중 한 운전기사와 잠깐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조금 전 나에게 도와주기 힘들다고 했던 한 남자가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그와 그의 여자친구는 내일 상파울루로 간다고, 혹시 내일이라도 같이 갈 생각이 있다면 태워줄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여정을 마치라는 뜻이구나.’
그에게 내일 같이 가겠다고, 고맙다고 답했다.
그는 지금 여자친구를 이 근처 직장에 데려다주는 길인데 그 후 다시 쿠리치바로 돌아갈 거라며, 원하면 지금 차에 타고 함께 이동 하자고 했다. 나는 쿠리치바로 돌아가는 대로 노숙자 숙소를 다시 찾아가 오늘 하루를 더 묵게 해 달라고 부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은 리카르도와 나탈리아였다. 나탈 리아는 영화 학교에서 에디터 일을 하고 있고, 그녀의 오빠 역시 그 곳에서 영화 촬영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리카르도 또한 영화를 매우 좋아한다며, 특히 한국의 김기덕 감독 영화의 굉장한 팬이라고 했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열 번 이상 봤고, ‘활’도 네 번 정도 보았다고 하니 대단한 팬임이 틀림없었다. 한국의 영화감독을 이렇게 좋아한다니 왠지 반가웠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에서는 나탈리아의 오빠 안드레를 비롯한 촬영 스텝들과 배우들이 한창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양한 분장을 한 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하고, 그들이 장 비 나르는 것을 조금 도왔다.
그곳을 구경한 후, 리카르도와 나는 다시 차에 올라타서 쿠리치바로 향했다. 그는 오늘 저녁 친구들과 스키야키 (일본 음식) 를 만들어 먹을 예정이라며 재료를 사러 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스키야키 만드는 법을 아냐고 물어보고는 생각 있으면 같이 먹자고 초대해 주었다.
그와 함께 일본 음식 재료를 파는 한 마켓에 들러 몇 개의 재료를 샀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커다란 공원을 보았는데, 그가 동물원 같은 곳이라며 차를 주차하고 그곳을 구경 시켜 주었다. 그곳을 천천히 걸으며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얘기가 잘 통한 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함께 그다지 비싸지 않은 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식사요금은 내가 지불했다. 아직 그 정도의 돈은 남아있었고, 이제 곧 상파울루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다소 여유가 생긴 덕분 이었다. 식사를 하며 그와 여행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네팔에서 무일푼으로 여행을 했다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친구는 지금 브라질의 집을 팔고 차 한 대를 사 아마존 유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 역시 아시아 인이라고, 브라질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라고 덧붙였다.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가 오늘 밤은 그냥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함께 출발하자고 권해주었다. 오늘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보고는 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의 집 거실에 앉아있자 그가 김기덕 감독의 ‘활’이라는 영화를 틀어주었다. 근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듣는 한국말이 낯설어 처음에는 그들의 대화를 잘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그 얘기를 리카르도에게 하자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몇몇 교민들이 왜 한국말을 잊어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클래식 기타를 하나 가지고 나오더니 나에게 몇몇 곡들을 연주해 보였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연주자였고, 그의 연주는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그 무엇보다 황홀할 정도였다. 그는 또 날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자신이 좋아하는 몇몇 연주자들의 라이브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연 주에 맞추어 애드립 연주를 한동안 선보이기도 했다.
난 그가 자신의 느낌에 충실한 음악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음악은 통상 비주류로 취급되는 것이었는데, 그건 다른 말로 선택받은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긴 세월 자신을 음악에 바쳐왔지만, 본인이 사랑하는 음악이 돈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제 돈을 벌고 싶다고 말 했다. 그의 나이는 34살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몇 개의 광고도 보여주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광고 제작도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의 여전한 독창적 방식이 음악 뿐만 아니라 광고 제작에도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는 항상 대중의 공감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고, 그래서 결국 돈을 위해 원치 않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게 힘들다고 했다.
나는 적어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대중적인 것은 되도록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코드를 따라가야 한다. 그건 어떤 이에게 쉬운 일일 수도, 혹은 더욱 어려운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저녁이 되자 그의 여자친구인 나탈리아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 그녀의 오빠인 안드레와 그의 스승이자 영 화 학교의 교수이기도 한 코다토씨가 함께 왔다. 코다토씨는 브라질에서 태어난 일본계 2세였는데, 이미 나이가 지긋하였다. 주위 친구 들이 그를 브라질에서 가장 알아주는 조명 및 카메라 감독 중 한 명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그는 영화의 모든 것을 안다고, 그가 안드 레를 이곳 세계로 이끌어주었다고 했다.
스키야키는 코다토씨가 직접 요리해 주었다. 난 그것을 맛있게 먹 기만 하면 되었다. 일본 음식과 함께 사케를 마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식사를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내 여행 이야기가 첫 번 째 공통 주제였다.
그들은 내 여행을 굉장히 부러워했다. 재미있는 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여행 이야기를 할 때면 모두가 걱정해주었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이 내 여행을 신나는 모험으로 받아들여 주고 있 다는 것이었다. 이미 내가 많은 길을 지나쳐왔고, 또 남은 길이 얼 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어 우리는 영화로 주제를 옮겼고, 그들은 역시 뜨거운 열정을 영화 이야기에 쏟아부으며 도중에 몇 개의 DVD를 이리저리 틀어 보기도 하고, 몇 개 장면은 돌려보기도 하며 긴 토론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사랑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일 것이었다.
늦은 밤이 되어 코다토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파울루에서 연 락하라며 나에게 전화번호 하나를 적어주고는 떠났다. 그가 간 뒤에도 우리는 한참을 더 깨어있었던 듯한데, 지금 시각을 보니 어느덧 새벽 5시를 넘기고 있다.
몇 시간 뒤엔 상파울루를 향해 떠나게 되겠구나. 이제 난 상파울 루로 돌아가게 되는 거구나. 묘한 기분이 든다.
46일 차 – 마지막 날
쿠리치바에서 상파울루로 향하는 길은 도로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
곳곳에 아스팔트가 깨어지거나 구멍이 생긴 곳이 많아 신경 써서운전하지 않으면 위험했다. 게다가 산길은 왕복 2차선 도로였는데 큰 트럭들이 오르막길을 만날 때마다 속력이 매우 느려졌기 때문에 뒤따라오던 차들이 정체되는 일이 많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리카르도는 좋지 않은 도로 상태와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피로에 적잖이 신경이 곤두서 있는 듯 말이 없었 다. 리카르도는 여러 차례 마리화나를 피워대며 운전대를 몰았고, 그의 옆에 앉은 나탈리아는 시작점부터 이미 곯아떨어진 채 잠에서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긴 시간을 달려 차가 마침내 상파울루의 근교에 닿았을 때, 비가 다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리카르도는 피로를 무릅쓰고 차가 막히는 중심가로 차를 몰았고, 나를 위해 센트로의 버스터미널까지 바래다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든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들과 포옹하고 그들의 차가 떠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 았다.
그리고 난 문득 지금 내가 상파울루에 도착해 있다는 것을 실감했 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내 여행의 종착지. 많은 이가 반대했고, 또 많은 이가 응원해줬던 그 길을 지나쳐 마침내 이 목적지에 도착 한 것이다.
난 내가 이곳에 도착하게 되면 두 팔을 번쩍 들고 환호를 지르게 되리라 생각했다. 손뼉을 치며 함박웃음을 짓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던 내 기대와 달리 왜인지 내 마음은 무덤덤할 뿐이었 다.

어쩌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 여정이란 애초에 끝이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끝 -